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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문학과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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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승리한 민간인은 없다. <'셰이커를 흔든 남자' - 마타요시 에이키 를 읽고>
작성자 홍정우 작성일 2020.06.26
조회수 149 첨부파일 전쟁에 승리한 민간인은 없다. [셰이커를 흔드는 남자] 2016102892 홍정우.hwp

 전쟁에 승리한 민간인은 없다. (셰이커를 흔드는 남자)

일본어학과 홍정우

중간고사 발표에 이어 이 작품을 선정해 다시금 에세이를 통해 무언가를 더 말하고자 하는 까닭은 조금 더 깊게 생각하고 싶은 내용과 담긴 작은 주제들을 글로써 정리하고자 하는 이유이다. 주인공 미노루에 모여있는 시선을 팔을 잃은 미군 병사 제임스에게 옮겨서 서술하고자 한다.

마타요시 에이키 작가는 인물들의 모호한 선악의 내, 외적 갈등을 작품에서 자주 묘사하곤 한다. 사람의 입장에 따른 선택과 그 관점에서 내리는 선택에 선악을 판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의식을 은연중에 제시하곤 한다. 이 작품에서도 또한 오키나와 인으로 피해자의 위치에 서 있는 미노루도, 미국인이라는 강자의 입장이지만 개인으로 보면 한없이 약한 존재인 린제이에게 자기 처지에 대한 복수, 즉 미국인에 대한 복수로 (아직은) 큰 죄가 없는 그녀를 임신시킬 생각을 하는 장면에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양면성과 그 갈등을 보여주었다. 이는 화자의 내면에서 오는 갈등을 그 자신이 성찰하는 방식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제시한 것이다.

반면에 작가는 서술의 주체가 아닌 제임스를 표현하기 위해서 상황과 반응만으로 그의 모습과 내적 갈등을 보여줘야 하므로 제임스는 간접적인 방식으로밖에 표현되지 못한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소설의 첫 시작과 함께 등장하며, 이후 승, , 결의 시작점마다 나타난다는 점과 그 장면들이 제시하는, 꼬집는바 등을 고려했을 때 작가가 설정한 작품의 주제와 불가결한 요소이며 조그맣게라도 작품에서 말하고 싶었던 소주제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제임스는 미군 병사로 극 중에서 제일 첫 부분에 만취한, 꼴사나운 모습으로 등장한다. 제 몸을 가누지 못하며, 비바람과 술에 절어 미노루의 바, 센트럴로 들어왔다. 그 상황 자체는 어찌 보면 처절해 보이는 장면이지만, 독자가 그저 그를 술 주정뱅이로 인식하며 혀를 찼던 이유는 일종의 고정 관념 때문이 아니었나 한다. 오키나와인들이 생각하는, 인종 차별적이며 전형적인 방탕한 미군의 상으로 제임스를 등장시킴으로써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그래도 싸다라는 일시적인 고정 관념을 형성시킨 것이다. 이후 선입견은 대화를 통해 반전된다. 그는 극복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채 PTSD를 겪고 있는 인물이었고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는 피해자였다.

다음으로 제임스가 등장한 장면은 해안가에서 대화하는 장면이다. 화자인 미노루는 자신과 어머니를 버리고 도망간 미군 아버지에 대해 여태 가지고 있었던 막연하지만 거친 분노를 같은 미국 군인이라는 이유로 제임스에게 표출해 버린다. 하지만 제임스는 가해자였던 그의 아버지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라는 상황에 고통받는 피해자에 불과하다. 미노루 또 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고뇌에 고통받는 제임스에게 미노루는 자기 자신의 감정을 거칠게 내뱉었고 그것은 제임스에게 어떤 긍정적 영향을 주지 못했다. 제임스는 다만 입술을 깨물며 미노루의 길을 잘못 찾은 꾸짖음에도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도덕적 인물상임을 보여주며 전형적인 피해자 가해자의 선악 구도를 뒤트는 역할을 한다. 미노루와 제임스는 통성명하고, 제임스는 다가오는 목요일에 베트남으로 전쟁을 하러 간다고 말하고 헤어진다. 이 장면에서 미군과 오키나와 사람 사이의 고정적인 피해자 가해자 입장이 반전된 미묘한 현실뿐만 아니라 둘 모두 현재의 고통받고 있는 피해자가 되어버린 현실을 잔잔하게 제시한다. 작가는 이를 통해서 오키나와에 나타난 시대적인 비극에 그 위치한 당사자들, 즉 고통받는 당사자들은 진정한 가해자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주고자 한 것이다.

다음으로 제임스가 등장하는 장면은 이 전에 만났던 해안가에서 미노루와 미사코 둘과 재회하는 장면이다. 전쟁에서 오른손을 잃은 제임스는 담담하게 팔이 잘린 경과를 말해준다. 미노루는 그에게 복수를 말하지만, 제임스는 그 고리의 끝을 말하며, 나쁜 일은 잊어버리고 다시 살아나갈 것을 미노루에게 말한다. 제임스는 팔을 잃었지만, 이전에는 없던 웃음을 찾았고 행복을 기대하는 희망 또한 찾았다. 그리고 제임스는 자신이 팔을 잃고서야 미노루와 대등한 관계가 된 것 같다고 말하며, 비로소 제임스는 미노루의 마음의 상처를, 미노루는 제임스의 몸과 마음의 상처를 정확히 인지함으로서 서로의 입장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사이가 되었다. 작가는 이 장면을 통해서 단순한 서술의 흥미를 위해 선악 구도의 반전을 꾀하는 것이 아님을 명확히 했는데, 오키나와인과 미국인과의 인간적 연대의 가능성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 인간으로서의 미국인을 설정하여 오키나와 사람과 똑같은 인간으로서의 미국인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제임스의 도덕성은 윌리엄스 가족과 대비되며 더욱 부각된다. 미사코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총으로 격살한 린제이와 윌리엄스와 대비되는 존재로 선악의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제임스를 통해 볼 수 있는 그들의 도덕성에는 엄연한 한계가 있다. 애초에 미노루,미사코의 입으로 제임스와 같은 미군이 어디에 있냐는 자문은 그런 도덕적 인물의 희소성을 지적한 것으로 그 바깥 현실에선 쉽지 않은 성찰임을 작가 스스로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결국 명확히 알 수 있는 작가의 생각은 전쟁에서 승리한 민간인은 없다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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