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황이라는 아(我) <‘평화 거리라 이름 붙여져 있는 거리’ - 메도루마 슌 을 읽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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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홍정우 | 작성일 | 2020.06.26 | ||
조회수 | 189 | 첨부파일 | 천황이라는 아(我).hwp | ||
천황이라는 아(我) 일본어학과 홍정우 ‘평화 거리라 이름 붙여져 있는 거리’ 표현이 약간 어색하다고 느꼈다. 굳이, 이름 붙여져 있는 거리라 표현한 제목이 곱씹을수록 묘하지 않은가. 평화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은 그리 평화롭지 못한 까닭일까. 작가 메도루마 슌은 자신의 작품을 오키나와 문학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는 일본 본토 주류 사회에서 떨어져 있는 이질적인 사회와 그 관점을 통해 글을 써왔고, 독창적인 작가로 평가받게 되었다. 소설뿐만 아니라 지역신문과 잡지에 평론, 사설, 에세이 등을 게재하며 오키나와의 사회적인 이슈들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알리고 의견을 낼 뿐만 아니라 실제 시위 등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실천적 지식인이다. 그의 작품들 속에서 오키나와는 그 특유의 적극성이 묻어난다. 일본 문학과 동아시아 수업을 들으며 오키나와와 한국 간의 기저 정서에는 많은 유사함이 있음을 많이 느꼈다. 둘 다 식민 과정을 거치며 그 시간 동안 겪은 고통과 피해에 대해 가해자는 아직 그 책임을 다하지 않고 있다는 점. 우리는 오키나와에 공감하기 적절한 배경을 가진 셈이다. 다양한 입장에서 나온 분노와 그 울분에 쉽게 공감할 수 있었지만, 그중에 뚜렷하게 이 소설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천황에 대한 분노’이다. 황태자의 방문이 거리의 평화를 쫓아냈다. 한국인으로서 천황이라는 존재를 생각했을 때, 그 이름부터 굉장한 거부감이 든다. 하늘의 황제라는 오만한 이름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때 그 이름으로 자행된 일본 정부의 수많은 탄압과 뿌려진 피들을 생각하면 거부감이 드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그들은 자신의 이름값에 책임을 지지 않았으며 그러한 배경에서 우리는 아직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 오키나와도 과거 오키나와가 받은 상처에 대한 합당한 사과나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도 그들의 권리가 침해받고 있다. 소설의 배경 시점 당시의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로 귀속되면 일본 정부가 미군기지 문제를 덜어줄 것이라 믿었지만, 몇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미군은 주둔하고 있다. 그런 오키나와 사람들의 입장을 대표하는 인물인 소설 속의 화자와 그 가족은 평화의 상징으로 포장된 황태자의 방문으로 일상을 침해받기에 이르며 이는 오키나와 경찰과 아버지의 직장 상사를 통해 오키나와인 스스로 그 기본권을 침해토록 종용받는다. 이는 협조적인 오키나와 사람과 비협조적인 오키나와인 둘을 분리해서 격리함으로서 그들 내부의 분열을 일으키며 그들 사회에 보이지 않는 악영향들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위험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신경쓰지 않는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작가는 황태자에게 인분을 투척함으로써 일본 정부와 그 상징인 천황에 대해 오키나와의 울분을 토해낸 것이다. 그들의 분노는 합당하고 정당해 보인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과연 그 분노가 올바른 방향을 띄었는가이다. 현재 천황 일가는 제 선조들의 과오를 사과할 자유조차 빼앗긴 상태가 아닌가. 의회의 승인을 입어 말하고 움직이는 사람이며 상징성 이외에는 가진 것이 없는 자신의 목소리는 없는 괴뢰에 불과하다. 또한, 우리 현대 사회에서는 연좌제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 그들에게 비난을 가하는 것은 과연 합당한 것일까. 오키나와인들은 이미 일본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들에게 남은 방법은 민주적 담화와 호소뿐이다. 하지만 그들 스스로 낼 수 있는 목소리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 그들의 성토를 공관에 던지며 정부에 가소로운 처분이 결정되기만을 기다렸던 과거에서 학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제 오키나와 인들은 그 접근 방식을 조금 다르게 해야 한다. 사실 대부분의 일본 국민은 오키나와의 실정을 제대로 모르고 있을 것이다. 조금 극단적인 예시로서 한국의 광주 민주화 운동이 널리 알려지지 못했던 것과 비슷하다. 그들이 받아들이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으며 그러므로 애초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이에 오키나와는 베트남 사회가 그러했듯 월남전에서 전쟁범죄를 저질렀던 한국인들에 대한 사실을 사람 대 사람으로, 대화를 통해 호소해 나가는 점진적인 방식을 진행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일본 시민과의 연대를 하는 것이다. 단순히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일본군 성 착취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남긴 말 “서로의 해묵은 분노로 일본과 원수지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나라 젊은 사람들이 올바르게 그들에게 이야기함으로 서로의 미래를 열어주었으면 한다.”에서 볼 수 있듯, 우리 한국도 일본에 대한 지나친 공격적 생각과 오랜 증오를 어느 정도 내려놓고 그들과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것처럼, 오키나와인들 또한 마찬가지로 일본이라는 비아 속의 아가 되어줄 민주적 시민들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하고 그들과 연대를 통해 과오를 짚고 넘어가는 것 만이 지금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문학의 힘으로서. 결국 메도루마 슌 작가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의 문학의 힘으로 호소하하여 시간이 흘러 다른 누군가가 그 목소리를 대변할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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