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공간,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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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신민섭 | 작성일 | 2019.06.25 | ||
조회수 | 286 | 첨부파일 | |||
두 공간,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다. - 라쇼몽(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비평 2017102721 신민섭 라쇼몽은 굉장히 짧은 단편 소설이지만, 이 짧은 단편 소설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점을 안겨주는 소설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떠올랐다. 봉준호 감독은 영화 ‘기생충’을 보고 나서 ‘관객들이 오만 생각이 다 들길 바란다.’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이 라쇼몽이라는 작품은 독자로 하여금 정말 오만 생각이 다 들게 하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라쇼몽에서 그려지는 삶에 대한 태도는 기생충에서 그려지는 삶의 태도와 유사한 점이 있다. 피지배계급간의 마찰, 도덕, 이기주의와 같은 대목에서 두 작품의 등장인물은 어떤 사고를 하고 어떤 행동을 했는가? 지금부터 알아보도록 하겠다. 라쇼몽이라는 작품은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 된다. 화자가 관찰하고 있는 대상은 라쇼몽 아래에서 비가 멎기를 기다리고 있는 하인이다. 이 하인은 해질 무렵에 홀로 라쇼몽 아래에서 비를 피하고 있다. 분명 소설의 시작에서는 화자가 ‘비가 멎기를 기다리고 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머지않아 화자는 이를 정정한다. ‘비가 멎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닌 ‘하인이 갈 곳이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적당하고 말이다. 그렇다. 그는 노숙자 신세이다. 그는 최근 이삼 년 동안 교토에서 일어난 재해로 인해 경제가 어려워지자, 형편이 궁해진 주인이 그를 내쫓아 갈 곳 없는 신세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생충에 등장하였던 어떤 인물이 하인의 상황과 닮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정부 문광이 바로 그 대상이다. 문광 역시 주인집으로부터 쫓겨나게 되며, 쫓겨난 이후로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하지 못 한다. 두 인물 모두 지배계급에게 버림받아 갈 곳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갈 곳을 잃었을지언정, 두 인물 모두 도덕성을 저버리지 않으려 노력한다. 하인은 본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쉽사리 행동에 옮기지 못 한다. 문광은 비 오는 날에 온 몸이 흠뻑 젖고 제대로 몸단장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삶의 질이 떨어졌지만, 그럼에도 주인집 가족이나 주인공 가족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그저 창고에 있는 남편을 데려오기 위해 간곡히 부탁할 뿐이었다. 하지만 두 인물은 각각 ‘라쇼몽’과 ‘지하실’이라는 공간에서 생각을 전환한다. 이 두 공간은 작품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공간으로 묘사된다. 라쇼몽은 본래는 교토의 큰 문이었으나, 지금은 돌보는 사람 없는 황폐한 공간이다. 이윽고 교토의 상황이 안 좋아지자 거두어 줄 사람 없는 시체를 버리고 가는 장소로 변모했다. 지하실은 부자집 아래에 벙커로 지어져 문광의 남편인 ‘근세’를 숨기고 있던 장소이다. 두 장소 모두 상당히 으슥한 장소로 그려지며 각각 노인과 근세라는 인물이 머물고 있는 장소다. 라쇼몽 누각 위에서 하인는 노파를 만나고, 노파의 도덕적으로 악한 행위에 분노하고 노파를 위협한다. 노파가 반항하지 못 하자 그는 순식간에 노숙자에서 한 명의 목숨을 잡고 있는 ‘갑’으로 변화한다. 소설은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노파를 처음 위협 할 때는 윤리적 증오가 그의 행동을 이끌었지만,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고 더 이상 윤리는 상관이 없어지고 상대방을 지배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만족감만이 남았다고 볼 수 있다. 자신도 주인집에게 쫓겨나 노숙자가 된 ‘피해자’가 된 경험과 아픔이 있음에도 하인은 본인보다 아래 있는 다른 사람에게 ‘가해자’의 입장에 슨다. 이러한 양상은 기생충에서도 나타난다. 지하실에서 문광은 주인공 가족의 사기 행각을 알게 되고, 그들을 협박하고 지배하려 한다. 이때의 문광에게 그 동안 가지고 있던 인자한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문광뿐만 아니라 주인공 가족에게도 그대로 나타난다. 라쇼몽과 지하실은 두 피해자가 가해자로 바뀌는 현장이다. 또한 과거의 자신이 겪었던 아픔을 통해 타인에게 공감하는 것이 아닌 본인들이 ‘지배자’로 군림하려 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결국 여기까지 언급된 모두가 피지배계층이라는 것이다. 노숙자, 노파, 문광, 주인공 가족 모두 사회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 자들이다. 이들은 지배계층에게 지배를 당하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피지배계층의 아픔을 알고 있음에도 상대방보다 우위를 점하자 윤리 의식은 희미해지고 상대방을 지배하려는 의식이 커진다. 왜 이 작품들은 이러한 대립 구도를 그렸을까? 무엇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걸까? 두 작품의 이야기를 좀 더 하면 라쇼몽의 하인은 이후 노파의 이야기를 듣고 본인이 살아남기 위해서 악행을 행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행위이기에 정당한 행위라는 결론을 내리고 노파의 옷을 빼앗고 라쇼몽 아래로 사라진다. 그는 이제 도둑질을 일삼는 사회의 기생충이 됐다. 기생충에서는 주인공 가족의 행동으로 인해 문광은 지하실에서 목숨을 잃고, 이에 분노한 근세가 지하실을 나와 주인공 가족을 살해하려 한다. 두 작품에서 계속해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피지배계급이 같은 피지배계급을 공격하려 하는 것이다. 그 본인들을 이러한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사회구조나 지배계층에 대한 저항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때그때 우위에 선 자가 눈앞의 약자를 짓밟을 뿐이다. 그리고 여기서 특이한 점은 이러한 행동이 나타나게 된 장소는 현실과 단절된 장소라는 것이다. 라쇼몽은 주위에 사람이 오지 않는 장소이며, 사다리를 타서 올라가야하는 지면과 단절된 장소다. 지하실은 집 속에 숨겨져 있으며, 특수한 방법으로만 들어갈 수 있는 외부와 단절된 장소다. 현실에서 떨어진 장소에서 이들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고 서로 싸우는 장면은 우리로 하여금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라쇼몽과 지하실 모두 건설 목적은 피지배계급이 아니라 지배계급을 위한 것이라는 것도 눈여겨 볼 점이다. 그들은 지배계급의 요구로 지어진 공간에서 윤리 의식을 상실하고 ‘이기주의’를 깨닫는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와 이를 삶의 근반으로 삼는다. 결국 두 작품이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지배계층이 만든 이 사회 안에서 우리는 윤리 의식을 상실해하고 지나친 개인주의로 나아가고 있으며, 사회를 만들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 원인은 지배계층이지만, 우리는 우리끼리 싸울 뿐이라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경희대학교 일본어학과,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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