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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고한 민간인과 그들을 그려내는 손, <반딧불이의 묘>를 통해 바라보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좁혀질 수 없는 간극
작성자 정재오 작성일 2019.06.25
조회수 160 첨부파일

무고한 민간인과 그들을 그려내는 손, <반딧불이의 묘>를 통해 바라보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좁혀질 수 없는 간극

2017110372 정재오

 

 

나는 10살 무렵 학교에서 처음 <반딧불이의 묘>를 보았다. 심하게 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딱히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당시 그 영화를 보던 아이들 대다수가 울고 있어서, 창피한 기억 축에도 들지 못했다.

 

그리고 한국사 수업으로 비로소 역사의식이 생긴 18살 무렵, 다시 한 번 <반딧불이의 묘>를 보았다. 그때는 세츠코 남매가 그런 파국을 맞은 것이 자업자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금 눈물을 흘렸다. 이건 조금 창피한 기억이었다. 이런 걸 보고 울다니, 나도 모르는 새 너무 일본 문화에 물들어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와 25살이 된 지금에 와서는 내가 흘렸던 눈물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 나름의 사상이 생긴 까닭이었다. 그 영화를 보는 사람이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세츠코를 보고 흘린 눈물은 옳은 것이라고 확신한다. 

부연설명을 하자면, 우리가 책임을 지울 수 있는 대상은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었던 인물에 한한다. 다시 말해 전쟁을 거부할 힘이 있었던 사람만이 비판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국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 놓여있던 5살짜리 세츠코는 도저히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그런 그녀에게까지 책임을 지우는 것은 연좌제이자 억지이다. 적어도 영화 속의 그녀는 명확한 피해자이고, 동정 받을 자격이 있는 캐릭터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영화에 나온 모든 인물들을 동정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보아야 하는가? 그에 대해서는 당연히 아니라고 답하겠다. 우리가 진정 분노하고 배척해야 할 것은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었던 인물들이며, 더 나아가 세츠코라는 캐릭터를 그려낸 수많은 손들이다.

그 당시 자국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자신도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 정말 어찌할 수 없이 피해를 입은 일본인도 존재했을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오키나와에 살던 다나카씨는 지적 장애를 앓고 있었다. 그는 본토에서 자신이 차별 받는 이유를 알지 못했고, 어째서 전쟁에 참가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는 그저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 따르다가 원폭으로 인해 고통스럽게 사망하였고, 그가 매장된 곳은 아직까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것은 내가 가정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이고 비참한 인물상이다. 그리고 한국인으로서 그를 동정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하겠다. 그러나 그의 일생을 다큐멘터리로 촬영하고 일본 전역에 방송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극렬하게 반대할 것이다. 일부의 극단적인 예시로 그 집단 모두를 대표하고자 하는 행위는 지양되어야 하며, 그것은 오로지 자신들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과거를 헤집고 끄집어내는 가장 끔찍하고 역겨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현재 일본 미디어는 이러한 행동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고 있다. 단란한 가족, 어린이, 무력한 여성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소재가 반전이라는 그럴듯한 명분하에 일본의 고통과 슬픔만을 드러내는 데 이용되고 있다. 그리고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미디어가 빚어낸 이미지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그 시절을 슬프고 아름다운 노스탤지어로 인식하고 있다. 제대로 목소리를 내고 그러한 흐름에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반딧불이의 묘>의 영화 평점은 굉장히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한국에서 이 작품이 받는 박한 평가에 비하면 너무도 큰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일본인 평론가 그 누구도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대해 반성하는 기미가 없다’라고 비평하지 않는다. 그저 일본 애니메이션에 한 획을 그은 불후의 명작이라고 평가할 뿐이다. 그것이 일본인의 주류의식이고, 앞으로 바뀌기도 요원해 보인다.

반면 한국인의 주류의식은 선대의 역사에 대해 감정적 평가를 공감하는 정도가 유난히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옛 역사적 사건과 옛 말씀을 현재 자신이 하는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도구로 사용하였던 전통인 ‘술이부작’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일본 또한 근세까지 이러한 특성이 두드러졌었지만, GHQ 이후 아메리카나이제이션으로 인해 극우 이외에는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이렇듯 감정적 분노를 역사적 평가라는 필터를 제대로 거치지 않고, 정치적인 영향이 강한 현대 대한민국의 공교육으로만 배운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여과되지 않고, 정리되지 않은 분노를 무차별적으로 일본에 투영하게 된 것이다. 일본의 제국주의는 분명 잘못된 역것이나, 이것을 역사라는 도구로 잘 정리하여 유산으로 삼고 다음에는 이렇게 되지 않도록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중간 과정을 생략하게 되고, 일본 작품에 대한 무차별적 분노로 투영하게 된다. 실제로 네이버 평론 기준 <반딧불의 묘>의 평론가 평점은 8.25점이나, 네티즌의 평점은 6.58점에 불과하다.

 

이러한 시선을 바탕으로 <반딧불이의 묘>를 평가하면 다음과 같은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다.

 

1. 감독 본인은 작품이 반전영화로 인식되는 것에 반대했으나, 다수의 일본인과 한국인들은 이 영화를 반전영화로 인식하고 있다.

2. 세츠코라는 인물 자체는 동정 받을 만한 인물상이나, 전범이 아닌 어린이에 불과한 그녀의 이야기만을 다루는 시도 자체가 불손하게 비춰질 여지가 있다.

3. 작품이 매년 8월마다 전시 피해자를 다루는 일본 미디어에 전략적으로 쓰이는 현상 또한 비판받아 마땅하다.

 

1번의 경우 전쟁을 다루고 두 아이를 주인공으로 설정했다는 점에서 피할 수 없는 한계이기도 하다. 감독 본인은 세이타를 군국주의에 찌든 무능한 인물로 그려내 그에게 비판이 집중되는 결과를 원했으나, 세이타 역시 어린아이에 불과했기 때문에 오히려 관객들의 동정을 받는 결과가 나오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반전영화로부터 멀어지려는 감독의 시도는 실패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번과 3번의 경우 앞서 언급했던 일본 미디어의 폐단과 직접적으로 연계되는 부분이다. 특정한 무고한 민간인을 동정해야 하는 것은 맞으나, 그들을 내세워 전쟁에 가담한 일본인 모두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며, 그러한 시도 또한 해서는 안 된다. 감독 본인은 그렇게 평가받는 것에 반대했으나, 많은 시청자가 동정심을 느꼈다는 점에서 본인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가 도출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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