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히로시마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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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정재오 | 작성일 | 2019.05.14 | ||
조회수 | 370 | 첨부파일 | |||
히로시마는 지리적으로는 산요 지방의 중남부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히로시마 도시권의 중심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지리적 이점을 갖고 있었다. 게이한신과 후쿠오카 도시권의 중간정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주고쿠 지방 및 시코쿠 지방을 총괄하는 정부 기관이나 전국 규모 기업의 지방 거점도 많이 놓여 있었으며, 또 서일본 유수의 공업 도시이기도 해 연안부는 공업지대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이 근대의 역사와 결합된 이후, 오늘날의 히로시마가 있게 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1871년, 메이지 시대의 폐번치현 당시 히로시마시는 히로시마현의 현청소재지가 되었다. 당시 도시화 열풍과 지역적 이점에 힘입어 히로시마는 일본의 주요 도시가 될 수 있었다. 그 당시의 입지를 중명해주는 근거로는 1870년대에 정부의 후원을 받는 7개의 영어 학교 중 하나가 히로시마에 세워졌다는 것을 들 수 있다. 1880년대에는 히로시마 현령이었던 센다 사다아키의 노력으로 우지나 항이 건설되었다. 이로써 히로시마는 중요한 항구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단순히 항구 도시라는 지역적 이점만을 살린 것은 아니었다. 1894년에 산요 철도가 히로시마까지 연장되었고, 청일 전쟁 때 군사 수송을 위해 항구에 철도역이 건설되었다. 해상 교통 수단과 육상 교통 수단이 모두 완비된 도시라는 점에 힘입어, 전쟁 기간에 일본 정부는 일시적으로 히로시마로 옮겨왔다. 그리고 일왕1894년 9월 15일부터 1895년 4월 27일까지 히로시마 성을 본부로 삼았다. 이를 대본영이라고 한다. 이 당시 히로시마의 중요성은 청일 전쟁이 끝난 후 1895년 2월 1일부터 1895년 2월 4일까지 양국 대표간의 첫 번째 회담이 열렸던 데에서도 알 수 있다. 히로시마가 공업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19세기 후반에 방적 공장을 포함한 새로운 공장들이 히로시마에 세워진 덕분이었다. 1904년의 러일 전쟁 당시 군사 보급의 필요성을 통감한 일본 정부는 보급품을 수송하기 알맞은 위치에 있는 히로시마에 여러 산업 공장을 세웠다. 이는 6.25 당시 미국이 군사 보급의 필요성으로 일본에 군수 공장을 대거 신설했던 것과 맥을 함께한다. 이러한 산업화 열풍에 힘입어 1915년에는 히로시마 물산진열관이 건설되었다. 물산진열관은 신제품의 교역과 전시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후 1921년에 히로시마 현 상품진열소로 개칭하였다가 다시 1933년에 히로시마 현 상업장려관으로 바뀌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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