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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왕국 ~ 오키나와 역사
작성자 최진대 작성일 2019.04.02
조회수 1609 첨부파일

 

 

 

 

 

 

 

 

 

 

 오키나와의 역사는 류큐제도 및 주변의 여러 도서들이 어느 세력에게 영향을 받고, 어떤 이름을 사용하는가로 생각 할 수 있다. 이들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이들에게 관여하는 외세가 어떤 자들이었는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가 없다.

 

 류큐제도의 역사는 1322년 삼산시대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류큐제도를 남부 중부 북부의 세부분으로 나뉘어 패권을 다투었고 1429년 류큐왕국으로 통일이 되면서 우리가 흔히 이미지 하는 오키나와, 류큐의 통일 왕조가 시작한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e/e9/Five_men_wearing_Ryukyuan_Dress.JPG 

<류큐인들>

 

류큐왕국은 120년간 류큐제도를 다스리며 평화롭게 왕조를 유지했다. 하지만 1609년 에도막부 번중의 하나인, 현재의 가고시마 지역에 있던, 사쓰마번의 맹주 시마즈에서 정벌에 나섰다. 류큐왕국은 얼마 안가 그들에게 복속되었고 이것이 류큐인들의 역사속에서 본토와 처음 만나게 되는 시점이자, 이후 만날 수 많은 외세들과의 만남들 중에 최초의 사건이다.

  류큐인들은 시마즈에 의해 본토로 복속되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강한 뿌리를 형성하고 있었고, 본토에서 온 자들과 자신들을 다른 민족으로 이해하고 인식했다. 이러한 모습은 그들이 쓰는 언어에서도 나타났고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부분이 바로 우치난추와 야마토추라는 단어다. 심하게는 야마토추가 아닌 야마토짐승이라는 경멸의 의미를 담아 부르기까지 했으니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확연히 드러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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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사무라이>

 

일요일이 되면 병사들은 대낮부터 마을의 홍등가를 활보했다. 때로는 술에 취해 마을 길모퉁이에 숨어있다가 예쁘고 젊은 여자가 나타나면 뒤꽁무니를 쫒아다니곤해서 마을사람은 노란색 모자에 줄무늬의 검은 옷을 입은 일본 병사를 ‘야마토 짐승’이라고 부르며 경멸했다. 

 (야마시로 세이츄 – 구넨보 中)

 

 1879년 3월 27일 일본은 번을 폐지하고 현을 설립한다는 취지의 법률을 제정하여 전국에 폐번치현령을 내린다. 이는 복속되어 있던 류큐번에도 적용이 된다. 이로인해 같은 해 4월 4일 류큐처분을 통해 공식적으로 류큐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류큐번은 오키나와현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본토에 동화되어가는 기간이 지속됨에 따라 처음에는 강하게 본토와 자신들을 유리화했던 그들의 인식도 점점 흐려져가기 시작한다. 1879년 류큐처분이 선언 될 무렵에는 류큐인으로서의 자신인가, 야마토인으로서의 자신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이러한 모습은 소설 속에서도 자주 드러난다. 

 

 

미카에루가 하는 이야기가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모르지만 류큐인이란 정말로 저주받은 인종이라고 생각한다. 옛 막부시대에는 삼백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사쓰마에 무기를 빼앗기고 온갖 박해를 다 받았는데 지금은 또 이렇게 경제적으로 극도의 압박을 받는다니. 오랫동안 정말로 못견딜 일이라고 생각한다. 

(히로쓰 가즈오 – 떠도는류큐인 中)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시행한 일본은 세계 2차 대전에 참전, 승승장구를 하며 세력을 넓혀간다, 하지만 이들은 1941년 미국 진주만을 선제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다. 미국이 당황하여 일본의 협상을 할 것이라는 일본 대본영의 예상과는 달리, 진주만 공격은 미국의 본격적인 전쟁 참전을 이끌어 냈다. 1945년 까지 일본은 미군에게 번번이 격퇴당한다. 이로인해 일본 대본영은 일본 전역에 1억 총 옥쇄론을 설파하며, 미국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호소했다. 이러한 주장은 오키나와 또한 피해갈 수 없었다. 오키나와에서는 젊은이들을 모집하여 남녀로 나누어 부대를 특수 조직한다. 이들이 그 유명한 철혈근황대와 백합부대다.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330DE4E57D215EF3A 

<철혈근황대>

 

 이렇게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오키나와의 인구를 총동원하여 대비한 오키나와 전투는 일본과 미국간의 전쟁 중에서도 가장 처절한 전투중에 하나였다. 오키나와 전투 2개월간은 철의 폭풍이라고 불릴 정도로 수많은 총알과 포탄이 폭풍처럼 사용된 전투였다. 하지만 이러한 일본의 옥쇄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패배로 끝을 맺었다.

 오키나와에 있어서는 세계 2차 대전의 패배보다 오키나와 전투의 종결이 더 큰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본토가 종전일을 기리는 모습과는 달리 오키나와는 오키나와 전투 종결일을 기준으로 기리는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다.

 

일본의 패배로 일본 전역에 미군들이 들어오게 되고, 오키나와에도 미군이 들어오게 되며, 수많은 미군 부대가 설립되게 된다. 초기에는 미군은 오키나와에게는 해방군이었다. 1609년 이래로 억지로 자신들을 복속시켰고 류큐의 전통과 정신은 박해해 왔고 물리적으로도 본토와는 전혀 다른 취급을 해 왔다. 이러한 취급을 받아왔던 오키나와는 당연스레 본토에서 자신들은 떼어내어 최종적으로는 독립국으로 만들려던 미군들은 해방군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군부대가 설립되고 미군들이 일으키는 수많은 사건들에 오키나와의 시민들이 휘말리고 그 안에서 지배국과 피지배국의 차이점을 몸으로 느끼면서 오키나와는 미국 또한 다른 형태의 지배층일 뿐 특별할 것 없는 자들이라고 생각을 했다. 이러한 상황에 더불어 이 당시 일본은 패전의 책임을 위해 평화헌법을 개정하는 중이었고 이러한 평화적 무드에 힘입어 오키나와는 본토로의 복귀를 통해 예전과 현재보다는 더 나은 취급을 예상하고 바랬다. 이러한 바탕을 통해 1972년 복귀운동을 펼쳤고, 성공적으로 본토에 복귀를 한다,

 

오키나와는 여전히 본토에 비하면 많은 차별을 받고 있다. 본토의 정치인은 여전히 미국과의 정치적 거래에 있어서 오키나와를 버림패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이며, 미군부대로 인한 문제에 대해 눈을 돌리고 해결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모습은 아베 총리에게서도 많이 보여진다. 특히 2016년 위령의 날 행사에 참여하기 전에 미군부대에 관련한 합의에서 미군에게 편의를 봐주는 형태로 협상을 진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령의 날에 참가를 하였고 아베 총리는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엄청난 반발을 사기도 하였다.

 

오키나와는 여전히 본토와는 다른 자신들만의 뿌리를 지니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정기적으로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받은 설문에서도 나타난다. 오키나와의 독립에 관한 설문은 정기적으로 수합되는데 이들의 답변은 부정적인 답변이 더 많다. 하지만 이는 현실적인 문제가 고려된 답변으로, 만일 오키나와의 독립에 있어서 외교적 문제와 국방적 문제가 해결되는 상태라고 한다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고 물어보는 설문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독립에 대해 긍정적으로 고려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오키나와는 항상 본토와 류큐 사이에서 정체성을 고민하며, 그들과는 다른 무언가를 마음의 심지에 지니며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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